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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 규정의 빈틈을 그대로 적용했더니 생긴 일

대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인데 학점이 필요해서 들은 교양영어 수업이었고 교수는 여기서 H교수라고 하겠습니다. H교수가 형식 규정에 유난스럽기로 학과 전체에서 유명했어요. 일반적인 MLA나 APA 형식만 말하는 게 아니라, 강의계획서에 별도의 규칙을 여러 장 덧붙여 놓은 거임. 글의 내용과는 별개로 글꼴, 여백, 줄 간격, 쪽 번호 위치까지 각각 따로 점수를 매겨 놓음.

학기 시작하고 3주쯤 지나서 누가 형식 규정 안 지키면 어쩌냐고 물었더니 교수님이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내 지시를 적힌 그대로 정확히 따르면 형식 점수는 만점임. 예외도 없고, 비슷하게 했다고 부분 점수 주는 일도 없고"

알겠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그 주말엔 다들 대충 훑어보는 강의계획서의 형식 규정 부분을 한 줄씩 읽어봤었는데 눈에 띄는 부분이 두 가지였음. 첫째, 제목은 가운데 정렬해야 한다고만 되어 있었는데, 제목에 어떤 내용을 써야 하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어요. 둘째, 머리글에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고만 되어 있었죠. 이름을 몇 번 넣어야 하는 건 아니었는데..

다음 에세이 제목은 그냥 Essay라고 쓰고 가운데 정렬하고 글자 크기 제한도 안 적혀서 아주 크게 만들고 머리글에 내 이름 무려 11번 넣었네. 엄밀히 말하면 "머리글에 이름이 들어가야 한다"는 조건 충족한 셈이었지... 쪽 번호도 모든 페이지에 넣고 아무 내용도 없는 참고문헌 페이지에도 번호 넣고 그거엔 숫자 7만 덩그러니 쓰고

나름 꽤 뿌듯한 기분으로 과제 제출 ㅎㅎ

과제 돌려받았더니 교수는 형식 점수 까고 "전문성 떨어지는 형식"이라고 적어 두더군. 다음 수업에서 손들고, 내가 어긴 구체적인 규정이 뭔지 지적해 달라고 했더니 대답 못함. 실제로 규정 하나도 안 어겼는데 누구도 그렇게까지 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지. 난 몇 주 전 교수님이 했던 말도 강의실 전체에 들리게 다시 꺼내서 말했다.

교수가 분명 짜증이 난 상태였는데, 40명 앞에서 자기 말 부정하면 우습게 보일 수밖에 없었겠지. 결국 내가 깎였던 점수를 돌려받았고. 그리고 다음 에세이 제출할 때쯤에는 강의계획서 형식 규정이 거의 두 배로 늘어난 것도 놓치지 않았음. 내가 이용한 빈틈도 하나씩 따로 막혀 있더라.

형식 규정 허술하게 써 둔 사람의 규칙이라면, 다시 한번 끝까지 따져 보고 싶네요.

요약 : 교수님은 형식 지침 정확하게 따라가면 만점 줄 거라고 했는데 난 교수님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문자 그대로 따라갔더니 자기 말 부정 못해서 점수 까질 못함. 내가 찾아낸 빈틈 막으려고 강의계획서 일주일 안에 다시 쓰심

댓글

찾아낸 빈틈은 막았지만, 본인이든 다른 사람이든 조금만 더 꼼꼼하게 파고들면 또 다른 빈틈이 충분히 나왔을 것 같네요. 누군가 한번 시도하기만 하면 교수는 채점하면서 꽤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듯요. 어린아이처럼 신나서 손을 비비게 되는 상황이죠.

제목에 뭐라고 써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말은 뭔 소리임. 교수님이 내용이 아니라 형식만 채점한 건가? 그리고 저렇게까지 왜 한 건지도 잘 모르겠네

괜히 사람 괴롭힌 것처럼 보이는데.. 그렇게까지 규정에 매달린 것도 이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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